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문단 편집) == 배경: 남한 내에서 이산가족이 생긴 이유 == >'''갈 수 없는 길에 뿌려진 천만 인의 눈물이 있어''' > - [[서태지와 아이들]], [[발해를 꿈꾸며]] 中 과거 20세기 중후반의 [[대한민국]]에서는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많았고, 경찰 당국이 추산한 이들 '이산가족'의 수는 약 1,050만명에 달했다. 1980년대 초 당시 대한민국 인구가 약 4,000만명이었으니 네 명 중 한명 꼴로 이산가족이 있었던 셈이었다. 여기 소개된 이산가족들은 주로 일제의 징용, 징병이나 생계를 위해 해외에 나가 있던 동포들이 해방 이후 귀국길에 오르고, [[6.25 전쟁]] 중의 피난길을 겪으며 난리 통에 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쟁의 참화를 피해서 강제적인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지면서 온갖 종류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피난을 떠나며 사람 무리에 휩쓸리거나 [[공습]]이나[*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정밀폭격 기술이 없었던 당시에는 피난민도 공습의 표적이 되었다.(사람 무리가 보이면 무작정 공습을 가하던 시절이다.) 더군다나 한국과 유엔군 사이의 문화가 이질적이었고 당시 한국인들의 외국어 교육 수준 또한 낮았기 때문에 유엔군들은 빨치산과 일반 양민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었다. 오죽하면 당시 국군이 미군의 오폭을 받았을때 "We are the South Korean army" 내지는 "cease fire"같은 단순한 영단어를 몰라 죽었다고 했으니 말 다했다. ] [[포격]]을 피해 각자 달아나거나 하는 갖가지 사연으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전쟁 통에는 서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고 이것은 전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라면 모를까, [[냉전]] 초기 당시 한국에선 [[신문]], [[TV]], [[라디오]], [[전화]] 등 '''대중매체'''라고 할 만한 것이 미약했기 때문에 사실상 한번 헤어져버리면 서로 만날 길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도 [[인터넷]]만 빼면 있을 건 다 있기는 했지만, 인터넷 유무에 따른 정보 통신 전달 속도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또한 전화와 TV는 1970년대까지도 일부 계층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가의 사치품[* 1980년대 중반에 KBS에서 [[인구 센서스]] 통계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표준 남성을 선정했는데 아내, 두 아이와 함께 살며 '''집에 전화가 없는''' 40대 남성 가장이었다. 이 시기면 국가적으로 그렇게 푸시하던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개최가 다가온 시점임에도, 가정의 전화보급은 이때까지 완비가 요원했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은 되어야 사실 온가정에 전화기가 보급되고 [[공중전화]]가 사라지기 시작한다.]이었고, 방영 당시 흑백TV는 도시에서는 흔한 물건이 되었지만 1980년부터 나온 컬러 TV는 비싸서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라디오는 TV에 비하면 비교적 저가라서 보급이 어느 정도 되긴 했지만 방송채널이 제한적이라 이산가족 찾기에는 그다지 많이 활용되지 못했다. 신문은 상대적으로 접하기는 쉬웠으나[* 통계청 기준 1970년 대한민국 국민들의 비문해율은 7%였다.[[http://www.korean.go.kr/front/board/boardStandardView.do?board_id=6&mn_id=19&b_seq=208|#]] 그나마도 노년층의 비중이 높았고 경제활동을 할만한 인구 중에 [[문맹]]인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이후 조사 결과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줄어들어 1970년이 마지막 조사다.], 일반인이 신문에 광고를 계속 내기도 힘든 마당에 당사자가 그 광고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다가 이름 같이 한쪽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정보가 있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 또한 당시에는 정부에서 자원절약 차원으로 신문사마다 면수를 제한하던 시절[* 신문지 석 장,즉 12면.]이라 광고를 낸다고 해도 잘 찾아보지 않는 이상 찾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생활고로 인해 헤어졌다가 소식이 그대로 두절되는 경우도 많았다. 주로 [[식모|식모살이]]를 가거나 도회지 공장에 나간 사람들인데 심지어는 명절에 집을 찾아갔더니 가족들이 그새 이사를 가 버렸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해 그대로 이산가족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활성화되지 않아 [[사글세]]를 못 내 방을 빼고 쫓겨나거나 보증금까지 까먹고 야반도주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충분히 가능했던 일들이다. 또한 당시에는 [[출가외인]] 개념이 강하던 시대라 [[딸]]이나 [[누이]]가 시집을 가면서 친정과 연락이 끊어지거나, 입을 덜고자 친척이나 남의 집에 양자/식모를 보내거나 아예 [[고아원]]에 보내는 일이 많았고 이 와중에 전란, 생활고, 아동학대 등으로 원래 살던 곳을 떠나거나 오갈 데가 없어져 찾고 싶어도 못 찾게 돼버리는 경우도 흔했다. 실제 방송에서도 그런 이유로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례가 흔히 나온다. 이처럼 온갖 사연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당시 한국에는 넘쳐나고 있었지만, [[1980년대]] 초의 한국은 지금과 같이 [[인터넷]]은 커녕[* 인터넷의 전신인 [[PC통신]]은 이 방송 2년 후인 1985년 [[데이콤|데이콤]](現 [[LG U+]])에서 '생활정보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선보이지만, 이게 대중화되는 데도 10년이 넘게 걸렸다. 한국에서 일반인들도 가정에서 손쉽게 인터넷을 접하게 된건 [[국민PC]] 사업으로 PC가 충분히 보급되고 [[ADSL]] 등의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된 2000년도 이후로 보는게 맞다.] 전화보급망조차도 1권의 [[전화번호부]]로 1개 도를 아우를 정도로 정보가 원활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1983년 이전에도 이산가족들은 그나마 가장 널리 알릴 수 있는 미디어 수단인 [[신문]]을 활용하여 서로를 찾고자 했다. 구인광고란에 직접 광고를 내거나, 혹은 주요 일간지에서 가끔 추진하는 '사람 찾기' 기획을 통해 서로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해 왔던 것이다. 심지어 전쟁 중이었던 1951년 5월경에도 이런 광고들이 간간히 지면상에 등장했다. 그러나 신문의 경우 당시는 발행하던 지면도 적고, 사진을 지면에 넣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라 생각만큼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던 신문이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였는데 둘 다 8면짜리(즉 신문지 2장을 접어서 내던 신문이었다) 일간지였다가 이후 1980년대 초반에 한 장을 넣은 12면,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두 장 더 집어넣어 16면으로 늘어났다.[* 물자통제 및 보도통제로 신문 면 수 자체를 정부에서 통제하던 시절이기도 했고, [[북한]] [[로동신문]]의 경우는 이 통제가 21세기인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서 8면밖에 발행하지 않는다.] 간혹가다 '정부에서 주민등록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행정기관이나 경찰을 통해서 사람을 찾을 수 있지 않았냐'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에는 이게 불가능했다. 일단 1909년부터 호적제도가 정비되고 이후 일제가 전시 총동원령을 선포한 [[1942년]]에 도입된 주민등록 제도로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주민등록자료가 전부 확보되어 있었다. 하지만 해방과 전쟁의 혼란통 속에서 관공서가 여럿 파괴되어 [[호적]]을 포함한 행정문서가 아예 사라진 경우도 많았고, 게다가 전후 복구에도 허덕이던 당시 정부는 이산가족 찾기에는 신경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관공서를 통해서 뭘 해본다는 건 힘들었다.[* 참고로 전국민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해서 정부에게 관리하기 시작한게 [[1968년]]부터이며, [[주민등록증]]은 [[1970년]]에 처음 발급되었다.] 게다가 이런 혼란을 피해 멀쩡히 있는 자료라도 전산화가 안 된 상태로, 각 읍/면/동사무소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찾고자 하면 직접 자신이 발품을 팔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야 했다.[* 주민등록 자료의 전산화는 2000년대가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오죽하면 동사무소에서 입영대상 병적서류를 빼돌리거나 서류철의 가장 뒤로 옮긴다는 딱 봐도 엄청나게 허술한 방법으로 병역을 회피 혹은 연기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1.21 사태|김신조 사건]]이나 각종 [[무장공비]] 사건 등 각종 북한의 도발이 흔했던 시기라 행정적으로도 병역 관련해서는 가장 최우선으로 관리하던 시절이다. 그런 것조차도 관리가 저럴 지경인데 다른 행정서류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한국이 아직까지도 [[등기의 공신력]]이 없는 이유 또한, 과거 저런 식의 행정으로 만들어진 등기서류들의 문제 때문이다. (전산화를 했지만 전산화는 과거 문서로 만든 등기부를 컴퓨터로 옮겼을 뿐 그 원본의 진위여부까지 조사한 것은 아니라서다.)] 이랬던게 1980년대 초 경찰이 보유 중인 각종 주민등록 자료들이 전산화되면서 빠른 검색이 가능해졌고, 1982년부터 [[대한민국 경찰청|치안본부]]에서 이산가족 희망자에 대해 이름으로 검색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은 [[성씨]] 다양성이 매우 낮아 [[동명이인]]이 너무 많아서[* [[한자]] 이름으로 동명이인 여부를 어느 정도 가릴 수 있지만 당시 전산 체계는 [[DOS/V|한자를 입/출력할 수 있는 기능]]이 없었다.] 어지간한 희귀 성씨가 아닌 이상은 이것만으로 찾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이름과 함께 이를 대조해볼 수 있는 얼굴이나 기타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고, 그래서 이 프로그램이 나오게 된 것이다. 또 1980년 컬러방송이 시작되고 컬러TV의 보급과 1TV의 중계소가 여러 개 있어서 남한 국토 대비 가시청률이 90%대에 육박했고[* 반면 2TV는 언론통폐합 후 전국방송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70%대였다.] 이산가족 프로그램이 기획된 게 1983년이니 사실상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자마자 바로 한 것'''에 가깝다. 그만큼 가족끼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의 애절함이 간절했다는 뜻.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